시야가 천천히 열린다.
독자의 시선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였다.
아름답고 파란빛으로 가득 찬 우주. 아직 죽지 않은, 살아있는 빛들이 찬란하게 반짝이며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빛들 사이에서—
로블록스의 아이콘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우주를 가르며, 작고 날렵한 비행체 하나가 유유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디폴투의 ZI존블록시라이더.
ZI존블록시콘을 탄 디폴투는 이 황혼스러운 우주가 이제는 지겨운듯, 아케인 행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로블록시안 제국에 발을 들인 첫날, 누군가가 당신에게 물었다고 가정하자.
그 질문의 답이 바로 디폴투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출신이 어딘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중심부에 합격하던 날, 심사관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 존재, 심상치 않다. 강력하고 정밀한 능력. 전장에서도 잃지 않는 넉살, 가끔씩 나사 빠지는 성격, 털털하고 능청스러운 성격.
최연소 활동부 부대장. 로블록시안 제국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몇은 그가 '밴랜드' 출신이 아닐까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의 묘한 매력에 그 의심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무도 그를 끝내 미워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행성들의 수는 굉장히 많고, 그 사이의 거리는 꽤나 멀지만 ZI존블록시라이더는 꽤?나 고성능이었기에, 아무리 먼거리라도 1시간 30분이면 어디든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은 어디든 1시간 30분 드립 참조💀)
ZI존블록시라이더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아케인.'
모든 행성들의 중심이자 출발점. 빌더맨 경이 만든 거대한 기둥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그 아래엔 각양각색의 입구들이 존재했다. 수많은 로블록시안들이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저 기둥 하나하나가 '게임'의 세계였다—당신들이 체험에서 플레이하는 바로 그곳.
그들은 체험에 있는 요소들은 모두 한낱 코드 덩어리들이라 별 능력도, 악용, 테러도 못할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케인 행성도 코드로 이루어져있음을 아는 자들은 현재 모두 죽었기 때문에, 시도를 안하는 것이지만..
아케인 내부로 진입하자 디폴투는 ZI존블록시콘을 펼쳐 포탈을 열었다. 빠르고, 거의 아무 소리도 없이. 로블록시안 정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포탈이 공기를 가르며 닫혔다.
// 포탈은 편리하다. 하지만..편리하지 않게 로블록시안 제국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 그렇다. 디폴투는 아직 이 능력에 미숙하다. (아주 약간이지만!!!)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인식 장치가 디폴투의 시야에서만 채팅을 보이며 말했다.
문이 열리며 로블적인 공기가 쏟아졌다. 살균된, 조금은 차가운 공기.
// 로블적인: 인공적인
오늘도 중심부는 돌아가고 있었다. 디폴투의 존재를 알아챈 이들이 하나둘 말을 걸었다.
다들 그보다 오래된 인격들이었다. 그러나 몇몇은 형이라 불렀다.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조언도 아낌없이 해주는 존재라서.
누가 손을 흔들면 같이 흔들고. 하이파이브를 요청하면 가위를 내 카운터를 쳤다. 동네 아저씨 같으면서도 어딘가 미스터리한. 모두가 좋아하는 모습.
로블록시안 제국에서의 삶은, 너무 좋았다. 너무 행복했고, 너무 평화로웠다.
그 모든 것이, 마치 공들여 쌓은 조각상처럼— 언제고 무너지기 위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는 오직 디폴투의 발소리뿐이었다.
그러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세상은,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어긋난 조율. 건반이 눌릴 때마다 뭔가가 구겨지는 것 같다.
배경이 일그러진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벽에서 표정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수십, 수백 개의 표정. 그 중에 웃는 것들은 하나같이 규칙을 만든 자들의 것이었다.
무언가가 끝없이 압박해온다. 숨이 막힌다. 흉곽이 조여드는 것 같다.
시야가 흐려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잊기로 했는데. 잊어야만 했는데. 생각하면 안 되는데—
— ACCOUNT INTRUSION DETECTED —
페인트가 녹아내리듯 모든 것이 흘러내린다. 뼈대까지 드러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탈출이란 헛된 희망이었다.
잊을 수 없다. 기억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영원히.
손이 흔들린다. 하나인데 여러 개로 보인다.
이제 모든 표정들이 비웃고 있다. 나만을 보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무언가가 남았다.
R4의 모습으로. 아무 표정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아이.
정신이 돌아왔다. 세상이 제자리를 찾았다.
슈나링. 중심부 마법부의 신입. '정화' 능력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로블록시안으로, 정화를 이용해 공간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언제나 디폴투의 뒤에 불쑥 나타나 그를 놀래키는, 밝고 에너지 넘치는 존재.
아, 디폴투보다 2년 더 오래된 인격이니 아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녀는 유독 디폴투를 좋아했다. 항상 먼저 다가왔고, 그 앞에서만큼은 웃는 게 의무인 것처럼 웃었다.
…디폴투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슈나링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갈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어제 일' 때문에.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슈나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위에 새겨진 글자를 속으로 읽었다.
『 통치자실 — 2대 통치자 청랑 』
디폴투는 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심각한 것을 까먹었다.
…노크를 빼먹었구나.
다시 문을 닫고,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청랑은 조용히 웃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청랑. 그녀에게서는 어떻게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흘렀다. 고결하고 섬세하고 신성한—로블록시안 제국의 통치자가 풍길 수 있는 가장 정밀한 종류의 위엄.
디폴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청랑은 처음으로 디폴투가 아닌 '폴투'라고 말했다. 이건 분명한 신뢰의 표시였다.
디폴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청랑은 잠시 의아해했다. 디폴투가 로벅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액세서리, UGC에는 쓰지 않았고… 그냥 조금씩 모으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디폴투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생겼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온도를 닮은 무언가가, 가슴 어딘가에 잠깐 스쳤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디폴투는 습관처럼 우주로 나갔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일종의 조깅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디폴투의 시야에 무언가가 걸렸다.
이상하게 생긴 실루엣. 다리가 없는, 이 세계의 어떤 로블록시안과도 다른 형태. 멀어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검고 불규칙한 무언가를 이용해서, 행성과 행성을 잇는 연결선을 끊고 있었다.
아케인의 '코어'에서 뻗어나온 저 선. 저것이 끊어지면—
그 행성에 있는 모든 로블록시안들은 죽는다. 서버가 종료되듯이.
평소보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선을 자르던 그자는 디폴투를 보더니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 디폴투는 즉시 ZI존블록시라이더를 최고속도로 올려 뒤를 쫓았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진 순간, 디폴투는 ZI블래스터를 겨눴다. 그러나—
그자는 어느새 디폴투의 눈앞에 서 있었다. 팔에서 돋아난 무언가로 내리쳤다. 굉장히 날카로운, 절대로 맞으면 안 될 것 같은 "가시". 살갗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쑤셔 박히는 것 같은 느낌.
디폴투는 빠른 반응속도로 가까스로 피했고, 곧바로 ZI존블록시콘을 여러 개 던졌다.
그자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가볍게 피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자의 몸에서 결함이 일어나며 잠깐 굳었다. 그 순간, 날아오던 ZI블록시콘이 강하게 명중했다. 디폴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
빠른 합이 오갔다. 상대의 휘두름을 예측하고 피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어떨 때는 피하는 것 같으면서, 어떨 때는 공격이 그냥 그자를 관통해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이 존재가 아직 완전히 이 세계에 '있지' 않은 것처럼.
그러다.
아래에서 몰래 날린 블록시콘이 맞았다. 그자는 끔찍한 글리치음을 내며 무슨 말을 했는데—
말은 안 했다. 그런 식으로 들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로블록시안들 중 영어를 아는 자는 극히 희박했다. 청랑 같은 특별한 존재를 제외하면.
디폴투는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시 돌진했다. 그자는 계속해서 영어로 무언가를 보냈다.
디폴투는 블록시콘을 끈질기게 던져 결국 다시 맞췄다. 멈칫하는 그 순간을 노려 무차별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자는 간신히 막아내면서…
해냈다. 위에서 ZI블래스터를 정확히 쏘아 맞혔다. 그자는 완전히 멈췄다. 오류가 걸린 스프라이트처럼. 아무 움직임도 없이.
디폴투는 침을 삼키며 천천히 다가갔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짧고 기묘한 침묵.
그러나 그자는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디폴투는 '씁… 보통은 이 순간에 갑자기 공격하거나 그러지 않나?' 하면서, 유저 목록에서 그자의 닉네임을 검색했다.
디폴투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 존재는… 스폰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황급히 무선으로 활동부에 연락을 보냈다.
에코는 디폴투의 양쪽 머리를 붙잡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귀가 터질 것 같은 굉음. 당장이라도 발작할 것 같은 글리치들이 디폴투의 시야 전체를 덮쳤다.
— SIGNAL OVERRIDE —
디폴투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떨쳐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 시끄럽고 정신없었다.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화면이 고정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에코의 몸은 색이 반전된 것처럼 보였으며, 그의 공허한 눈 속에 밴랜드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끝없는 어둠과 끝없는 규칙 없는 잔혹함.
에코의 발작은 무언가를 향한 다짐이었다.
쏟아져나오는 굉음들은 복수를 결심한 자의 것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력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눈앞은 결함들로 반짝거리고, 귀에서는 삐ㅡ소리가 점점 커졌다.
미칠 것 같은 그 찰나—
'둠브링거'의 아웃웨이브가 파동을 내어 디폴투와 에코를 동시에 날려버렸다.
묵직하고 잔인한 소리였다. 로블록시안 제국 최강의 로블록시안인 '플로이'도 기절할 만큼의 타격.
에코는 순식간에 나가 떨어졌고, 둠브링거는 연이어 사슬들을 던졌다. 사슬들이 에코의 몸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금세 에코는 손발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둠브링거. 법률부의 대장. 근데 법률부 주제에 힘은 디폴투랑 비슷했다. 역시 이 세상은 재능 차이인 걸까..;-;
단, 사슬에 스킬봉인 능력 같은 건 없었다. 에코는 왜 그 텔레포트를 쓰지 않는 것인가. 디폴투는 생각에 잠겼다.
둠브링거가 그런 그를 툭 쳤다.
투덜거리며 아케인으로 돌아가는 디폴투. ZI존블록시콘을 타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편, 에코는—
그의 눈에는 밴랜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공허했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한 문장만 되새기고 있었다.